수업을 20년 했는데도 매번 이상하다고 느낀 장면이 있다.
시험이 끝나고 학생이 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저 이 지문 다 이해했어요.”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실제로 이해했을 것이다. 물어보면 지문 내용을 설명도 한다. 그런데 그 문제를 틀렸다.
처음에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시간이 부족했겠거니 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이 20년 동안 반복되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구조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다르게 묻기 시작했다.
“이해한 다음에 뭘 했어?”
대부분 대답하지 못했다. 이해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줄 답: 수능 국어가 어려운 건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읽은 다음에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2014~2026학년도 평가원 시험 중 우리 DB에 태깅된 독서 영역 38회차 720문항을 분류해 보면, 지문에서 정보를 확인하는 유형은 33.9%뿐이고 나머지는 조건과 조건을 결합해야 답이 나옵니다. 그리고 함정이 만들어지는 논리는 어른이 매일 읽는 약관·공고·계약서와 같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증거 없이 하고 싶지 않았다
「문해력 2.0」이라는 이름을 꺼낸 뒤로 나는 계속 같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읽기는 이해가 아니라 판단이라고 말해왔는데, 그건 결국 내 경험담이다. 20년 현장에 있었다는 말은 근거가 아니라 이력이다.
그래서 증거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평가원 기출을 분석하는 데이터베이스를 오래 쌓아왔다. 문항 하나하나에 무엇을 요구하는 문제인지, 오답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속이는지, 정답의 근거가 지문 어디에 있는지를 붙여둔 자료다. 원래는 문제를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이번에는 그 자료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수능 국어는 도대체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가.
대상은 2014학년도부터 2026학년도까지 평가원 시험 38개 회차분의 독서(비문학) 영역, 총 720문항이다. 6월·9월 모의평가와 수능을 포함한다. 다만 이건 우리 DB에 태깅된 분량이지 그 기간 평가원이 출제한 전부는 아니다. 2014학년도 수능과, 수준별 시험이 있던 시기의 A형은 빠져 있다.
결과를 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현장에서 느낀 것보다 숫자가 더 분명했다.
첫 번째 발견: 지문에서 정보를 확인하는 유형은 3분의 1이다
문항이 요구하는 사고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다.
| 요구하는 것 | 비율 |
|---|---|
| 정보확인 — 지문에 적힌 것을 확인 | 33.9% |
| 적용 — 다른 사례에 옮겨서 판단 | 18.9% |
| 정보결합 — 떨어진 정보를 합쳐서 판단 | 14.3% |
| 추론 — 적히지 않은 것을 도출 | 11.9% |
| 어휘맥락 — 문맥 안에서 의미 확정 | 11.4% |
| 비판적평가 — 타당성을 따져서 판단 | 7.4% |
합이 100%가 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합 유형과, 위 여섯 범주에 들지 않는 소수 유형(비교·자료활용·인과관계 등)을 합쳐 2.2%로 따로 두었기 때문이다.
지문에서 정보를 확인하는 유형은 셋 중 하나다. 여기서 말하는 건 난이도가 아니라 그 문항이 요구하는 사고의 종류다.
나머지 66.1%는 지문 안에 답이 그대로 놓여 있지 않다. 읽은 것을 들고 나와서 다른 사례에 적용하거나, 떨어져 있는 조건들을 붙이거나, 적히지 않은 것을 끌어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정보확인 유형이 쉽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유형도 98%가 함정을 달고 있다. 다만 그 문항이 요구하는 사고가 결합이나 추론이 아니라 정확한 대조라는 뜻이다.
이 숫자를 보면서 나는 학생들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다 이해했는데 틀렸어요.” 그건 모순이 아니었다. 이해는 3분의 1까지만 데려다주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발견: 오답은 모르는 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이쪽이다.
같은 720문항에서 오답이 사람을 속이는 방식을 분류하자, 118가지 유형이 나왔다. 그런데 상위 세 가지가 전체의 약 39%를 차지했다.
- 맥락이탈 15.7% — 문장은 지문에 있는데 조건을 떼어냈다
- 인과역전 11.9% — 원인과 결과를 뒤집었다
- 유사어혼동 11.8% — 비슷하지만 다른 말로 바꿔놓았다
세 가지의 공통점이 보이는가.
셋 다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지문에 있던 말을 그대로 쓴다. 다만 관계를 어긋나게 놓는다.
그래서 지문을 이해한 학생이 걸린다. 이해했기 때문에 익숙한 문장이 눈에 들어오고, 익숙하니까 맞다고 느낀다. 함정은 무지를 노리는 게 아니라 익숙함을 노린다.
한 가지 더 있다. 720문항 중 함정이 아예 없는 문항은 12개, 1.7%였다. 나머지 98.3%에는 잘못 고르도록 설계된 선택지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게 앞에서 예고한 대목이다. 가장 쉬워 보이는 정보확인 유형조차 98.0%가 함정을 달고 있었다. 적용 99.3%, 정보결합 97.1%, 추론 100%, 어휘맥락 96.3%, 비판적평가 100% — 유형을 가리지 않는다. 즉 “어떤 사고를 요구하는가”와 “함정이 있는가”는 별개의 축이다. 확인만 하는 문제라고 방심할 자리가 아예 없다는 뜻이다.
이건 출제자가 심술궂어서가 아니다. 판단을 측정하려면 판단이 갈리는 지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발견: 근거는 한 군데 있지 않다
정답의 근거가 지문 어디에 있는지를 세어봤다.
두 문단 이상에 흩어져 있는 문항이 36.5%였다. 세 문단 이상도 11.5%다.
이게 무슨 뜻인가. 문장 하나를 아무리 정확히 읽어도, 다른 문단에 있는 조건과 맞춰보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 문항이 셋 중 하나가 넘는다는 뜻이다.
나는 이걸 조건 결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순간, 수능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수능이고, 여기부터가 당신 이야기다
방금 본 세 가지를 다시 읽어보자. 수능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 정보를 확인하는 유형은 3분의 1이고, 나머지는 조건을 결합해야 한다
- 함정은 모르는 말이 아니라 아는 말의 관계를 어긋나게 놓는다
- 근거는 한 군데 있지 않고 떨어진 자리에 흩어져 있다
이건 약관 설명이다.
요금은 1조에 있고 예외는 12조에 있다. “가능합니다”는 본문에 있고 “단, …”은 아래에 있다. 무료체험이라는 말은 크게 있고 자동 갱신은 작게 있다. 문장 하나하나는 다 아는 한국어다.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미끄러진다.
수능 출제자는 판단을 측정하려고 이 구조를 만들었다. 약관을 쓰는 쪽은 판단을 어렵게 하려고 같은 구조를 쓴다. 의도는 정반대인데 문서의 생김새는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을 쓰기로 했다. 수능을 잘 보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읽기 시험이 20년 동안 측정해온 것이 결국 판단이었다면, 그건 읽기의 본질이 판단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증명해 보자 — 약관을 수능 문항으로 만들면
말로 하면 비유에 그친다. 그래서 직접 해봤다.
먼저 밝혀둔다. 아래 약관은 지금 그대로 쓸 수 있는 유효한 약관 예시가 아니다. 2025년 2월 14일부터는 무료체험이 유료 정기결제로 전환될 때 사전에 소비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통보가 아니라 동의다. 그러니 여기 쓴 “가만히 있으면 유료로 넘어간다”는 방식은 현행 규제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이 구조를 가져온 이유는 하나다. 이건 합법 약관 샘플이 아니라 조건이 흩어질 때 판단이 어떻게 뒤집히는지 보여주는 읽기 실험이고, 그 읽기의 문제는 규제와 무관하게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정 회사의 실제 약관도 아니다.
제8조(이용요금) ① 회사는 최초 가입 회원에게 30일간 무료 이용 기간을 제공한다. ② 무료 이용 기간 종료일에 회원이 별도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경우, 이용계약은 유료 정기결제로 전환된다.
제9조(해지) ① 회원은 언제든지 서비스 내 설정 화면을 통해 이용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른 해지는 해지 신청일이 속한 결제 주기의 만료일에 효력이 발생한다. 다만 제8조 제2항에 따라 전환된 최초 결제 주기에 한하여, 결제일로부터 7일 이내에 해지를 신청하고 서비스 이용 이력이 없는 경우 결제 대금을 환급한다. 이 경우 이용 이력에는 무료 이용 기간 중의 이용을 포함한다.
자, 문제다. 수능 문항의 형식 그대로다.
문 1. 위 약관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회원이 아무 조치를 하지 않으면 무료 이용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계약이 자동으로 종료된다. ② 해지를 신청하면 신청한 날부터 서비스 이용이 중단된다. ③ 유료 전환 후 7일이 지나기 전에 해지하면 언제나 환급받을 수 있다. ④ 유료로 전환된 첫 결제 주기에는 환급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⑤ 무료 기간이 끝나면 회사가 회원에게 유료 전환 여부를 확인한다.
문 2. 다음 사례에 위 약관을 적용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A는 무료 이용 기간이 끝난 다음 날 요금이 결제된 것을 보고, 그날 바로 해지를 신청했다. A는 무료 기간 동안 서비스를 세 번 이용했다.
① 결제일로부터 7일 이내이므로 A는 환급받는다. ② A는 이용 이력이 있으므로 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③ 해지 신청일에 효력이 발생하므로 결제는 취소된다. ④ 무료 기간의 이용은 이용 이력에 포함되지 않는다. ⑤ A는 다음 결제 주기부터 요금을 내지 않으므로 손해가 없다.
정답과 판단 해설 보기
문 1 정답 ④
①번부터 보자. 제8조 제2항은 의사표시가 없으면 유료로 전환된다고 말한다.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이 종료가 아니라 전환이다. 그런데 사람의 기본 기대는 정반대다. “가만히 있으면 끝나겠지.” ⑤번과 함께, 이 약관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기대다.
②번 선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자. 제9조 제1항은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문장만 보면 ②는 맞다. 그런데 제2항이 그 효력 시점을 결제 주기 만료일로 미룬다. 1항만 읽으면 정답, 2항까지 읽으면 오답이다. 이게 앞에서 본 맥락이탈이다. 문장 자체는 약관에 있는 말이다.
③번은 “7일 이내”라는 조건만 가져오고 “이용 이력이 없는 경우”라는 조건을 떼어냈다. 조건 두 개 중 하나만 만족시키고 “언제나”를 붙였다. 부분을 전체로 넓힌 것이다.
⑤번은 약관에 없는 의무를 만들어냈다. 제8조 제2항은 오히려 회원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전환된다고 말한다. 사람은 “설마 말도 없이 결제하겠어”라고 기대하는데, 약관은 정확히 그 기대의 반대편에 서 있다.
④번이 답인 이유는 다소 심심하다. “경우가 있다”라고만 했기 때문이다. 조건이 붙은 문장을 조건이 붙은 채로 옮겼다. 정답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단정하지 않고, 범위를 넓히지 않는다.
문 2 정답 ②
이 문제가 이 글의 핵심이다. 근거가 한 군데 있지 않다.
환급 조건은 두 개다. (가) 결제일로부터 7일 이내 해지 신청 (나) 서비스 이용 이력 없음. A는 (가)를 만족한다. 그래서 ①번이 매력적이다. 실제로 이 문제를 사람들에게 주면 ①번을 가장 많이 고른다.
하지만 (나)에서 걸린다. A는 세 번 이용했다.
④번은 그 지점을 파고든 선지다. “무료 기간의 이용은 이용 이력이 아니지 않나?” 충분히 그렇게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이 약관은 마지막 한 줄에서 그 기대를 정확히 막아뒀다. “이용 이력에는 무료 이용 기간 중의 이용을 포함한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그 한 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서비스 이용 이력”의 범위가 불명확해진다. 그리고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5조 제2항은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않으면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고 정한다. 즉 그 한 줄이 없었다면 A는 “무료 기간 이용은 이력이 아니다”라고 다퉈볼 수 있었다. 답이 뒤집힐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문장 한 줄이 결론을 바꾼다. 시험지에서는 그 한 줄을 찾으면 정답이고, 계약서에서는 그 한 줄이 있느냐 없느냐가 내 돈이 돌아오느냐를 가른다.
이 문항의 근거는 제9조 제2항 한 문장 안에 있는 두 조건을 모두 확인해야 나온다. 하나만 보면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앞에서 본 조건 결합이 바로 이것이다.
풀어보면 알겠지만, 여기에 어려운 어휘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답이 갈린다.
그래서 성인 문서가 수능보다 더 위험하다
수능과 약관은 구조가 같다. 그런데 조건은 어른 쪽이 훨씬 불리하다.
수능에는 다섯 개의 선택지가 있다. 무엇을 비교해야 하는지 시험지가 알려준다. 약관에는 선택지가 없다. 무엇이 쟁점인지조차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수능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 어른에게는 없다. 없다는 건 넉넉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개 결제 버튼 앞에서 20초를 쓴다.
수능에는 정답과 해설이 있다. 틀리면 알려준다. 약관은 틀렸다는 사실조차 몇 달 뒤 결제 내역에서 알게 된다. 그때는 이미 틀린 상태로 시간이 흘러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 수능은 틀리면 점수를 잃고, 약관은 틀리면 돈과 권리를 잃는다.
우리는 시험을 대비해서는 20년을 훈련했다. 그런데 더 위험하고 더 자주 마주치는 쪽은 아무 훈련 없이 만난다.
이 글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문해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할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나는 그 말을 하려고 데이터를 꺼낸 게 아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것이다.
당신이 약관 앞에서 미끄러진 건 부주의해서가 아니다. 그 문서는 수능 출제자가 판단을 측정하려고 설계한 것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고, 심지어 조건은 더 나쁘다. 선택지도 없고 시간도 없고 해설도 없다. 그런 문서 앞에서 매번 정확히 판단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니 필요한 건 각오가 아니라 절차다.
수능에서 가장 많이 틀리는 지점과 약관에서 가장 많이 손해 보는 지점이 같다면, 한 가지만 훈련하면 양쪽이 같이 해결된다. 조건을 찾고, 그 조건이 앞 문장의 무엇을 좁히는지 확인하는 것. 그게 전부다.
오늘 읽고 있는 문서에서 이 표현들을 찾아보자.
단, / 다만, / 제외 / …의 경우에 한하여 / 별도로 정하는 / …을 제외한
찾았으면 한 줄만 적으면 된다. “이 조건은 앞 문장의 무엇을 좁히는가.”
그 한 줄이 오답 선지 세 개를 지운다. 시험지에서도, 계약서에서도.
조건과 예외를 찾는 3분 절차는 계약서·약관 편에서 더 자세히 다뤘다. 그리고 AI에게 요약을 시킬 때 왜 하필 그 “단, …”이 가장 먼저 사라지는지도 함께 읽으면 그림이 맞춰진다.
분석 자료에 대하여 — 이 글의 수치는 2014~2026학년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시행 시험(6월·9월 모의평가, 수능) 38개 회차분의 독서 영역 720문항을 자체 분류 체계로 태깅한 자료에 근거한다. 2014학년도 수능과 수준별 시험 시기의 A형은 표본에 없다. 사고 유형과 함정 유형 분류는 공식 분류가 아니라 문항 제작을 위해 우리가 만든 기준이며, 문항에 따라 판단이 갈릴 수 있다. 근거 위치 집계는 문항별 근거 표기에 등장하는 문단 번호를 세되 범위 표기는 양 끝을 포함해 계산했다. 연도별 비율은 22.6%에서 43.1% 사이에서 오르내렸고 일정한 방향의 추세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이 글은 난도 변화가 아니라 구조의 성격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 글은 thinkwith의 자체 조사·집계로 작성되었습니다. 출처: 「불국어」의 정체 — 수능 국어가 어려운 건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 thinkwith
자주 묻는 질문
수능 국어가 어렵다는 「불국어」는 무엇 때문인가요?
지문의 어휘나 길이보다 문제의 구조 때문입니다. 2014~2026학년도 평가원 시험 중 우리 DB에 태깅된 독서 영역 38회차 720문항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지문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는 유형은 33.9%입니다. 다만 이 유형이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보확인 유형도 98.0%가 함정을 동반합니다. 나머지 약 3분의 2는 읽은 내용을 다른 조건이나 사례와 결합해 판단해야 하는 유형입니다. 즉 수능 국어는 읽기 시험이 아니라 판단 시험에 가깝습니다.
지문을 다 이해했는데 왜 문제를 틀리나요?
이해와 판단이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720문항의 오답 함정을 분류하면 가장 많은 세 가지가 맥락이탈(15.7%), 인과역전(11.9%), 유사어혼동(11.8%)으로 합쳐서 약 39%입니다. 세 가지 모두 선택지의 문장 자체는 지문에 있는 말인데 관계가 어긋난 경우입니다. 그래서 지문을 이해하고도, 정확히 그 이해 때문에 걸립니다.
수능 국어와 약관 읽기가 무슨 상관인가요?
함정의 구조가 같습니다. 수능 오답에서 가장 흔한 유형은 조건을 떼거나(맥락이탈), 범위를 넓히거나(범위확대), 일부를 전체로 바꾸는(부분긍정에서 전체긍정) 방식입니다. 약관과 광고 문구가 사람을 미끄러뜨리는 방식도 같습니다. "가능합니다"에서 "단, …"을 떼면 맥락이탈이고, "첫 달 무료"에서 갱신 조건을 빼면 부분을 전체로 읽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만 수능에는 정답과 해설이 있고, 약관에는 없습니다.
근거를 한 군데서 찾으면 되지 않나요?
3분의 1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720문항에서 정답 근거가 두 문단 이상에 흩어져 있는 문항이 36.5%였습니다. 문장 하나를 정확히 읽어도 다른 문단의 조건과 맞춰보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조건 결합이고, 성인이 읽는 문서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요금은 1조에 있고 예외는 12조에 있습니다.
수능 국어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어려워진 건가요?
유형 비율만 놓고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연도별로 단순 확인형 문항의 비율은 22.6%에서 43.1% 사이를 오르내렸고 한 방향으로 꾸준히 줄어드는 흐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판단을 요구하는 구조는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시험의 성격이었다고 보는 편이 데이터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 분석은 유형 분류에 근거한 것이고 체감 난도는 지문 소재나 시간 압박 같은 다른 요인도 함께 작용합니다.
그럼 어른에게 수능 국어 공부를 하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수능은 여기서 증거로만 쓰입니다. 20년 가까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읽기 시험이 결국 무엇을 측정하려 했는지를 보면, 그 답이 어휘력이 아니라 판단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른에게 필요한 것은 기출 문제집이 아니라, 조건을 찾고 관계를 확인하는 절차 하나입니다.
성인 문서가 수능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수능에는 문제를 푸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어른은 대개 스스로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둘째 수능에는 다섯 개의 선택지가 있어 무엇을 비교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만, 약관은 무엇이 쟁점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셋째 수능은 틀리면 점수를 잃지만 약관은 틀리면 돈과 권리를 잃습니다. 게다가 수능에는 정답 해설이 있고, 약관에는 없습니다.
수능 국어식 판단 훈련은 어떻게 하나요?
지문을 더 많이 읽는 것보다, 선택지가 원문의 조건을 어떻게 바꾸는지 확인하는 훈련이 먼저입니다. 특히 단, 다만, 제외, 한하여, 경우에는 같은 표현이 앞 문장의 범위를 어떻게 좁히는지 표시해 보세요. 그리고 선택지를 볼 때는 지문에 있던 말이 그대로 쓰였는지가 아니라 관계가 유지되었는지를 보십시오. 수능 오답도, 약관의 함정도 대개 이 지점에서 만들어집니다.
오늘 당장 무엇을 하면 되나요?
지금 읽고 있는 문서에서 조건을 나타내는 표현을 먼저 찾아보세요. 단, 다만, 제외, 경우에 한하여, 별도로 정하는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앞 문장의 어느 부분을 좁히는지 한 줄로 적어보세요. 이것이 수능에서 가장 많이 틀리는 지점이자, 약관에서 가장 많이 손해 보는 지점입니다.